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만 제국 (문단 편집) == 경제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randbazaar19th.jpg|width=100%]]}}}||{{{#!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ottomanbazaar.jpg|width=100%]]}}}|| ||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바자르|그랜드바자르]] || 제국 지방의 [[바자르]] ||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는 명실공히 루멜리아, 즉 발칸반도였다. 오스만 유럽 영토에서의 세입은 16세기 오스만 정부수입의 절반을 차지했고 18세기에는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또한 [[실크 로드]]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유럽에 팔았고, 유럽의 황금과 은을 그 대가로 받아챙겼다. 당시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지중해 인근의 모든 무역로들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나와있으며, 이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근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압도적으로 비싼 무역세를 지불하면서 아시아와의 무역을 진행해야만 했다. 이같은 고관세, 고세율은 종교 문제와 함께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같은 종교에 따른 관세 차별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특히 [[셀림 1세]]의 재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은 2%의 관세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에 반하여,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은 4%에서 5%에 달하는 관세를 오스만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국 상인보다는 유럽 상인들이 더 많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높은 관세는 카피튈라시옹을 체결한 국가의 상인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각종 규제를 받아야 했다. 중세부터 이슬람 군주들은 세입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대한 많은 외국 상인과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의외로 해외무역 장려에는 무관심했는데 국고에도 이익이 안 되고 국부가 유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과의 무역은 유럽 상인조합과 회사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상인들은 국내와 해외 모두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했다. 세법을 보면 183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수입과 수출 모두에 3%의 관세를 부과했고 자국과 외국 상인 모두 상품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유통할 때 8%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1838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수출에는 12%, 수입에는 5%의 관세를 부과했지만 외국 상인은 제국 내 관세를 면제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전신인 셀주크 튀르크에게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육상 교역로를 넘겨받았고, 이 교역로를 이용하는 [[카라반]]이나 대상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특히 교역로 중간중간에 초소와 국영 여관 등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를 통한 수입을 따로 챙기기도 했다. 다만 도로의 질은 당대 술탄의 통치 능력이나 정부의 효율성에 크게 달려있었기에, 16세기와 17세기에 도로의 질이 가장 좋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도로의 질이 옛 시절보다도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해상 무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상 무역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며 그저 선박들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하는 데에 세금을 걷는 데에만 만족했다. 다만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해상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도 있어서, 조세를 늘리기 위하여 선단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향신료 무역을 실시했던 적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해양 활동 범위는 주로 동지중해와 [[에게 해]], 그리고 [[흑해]]와 [[홍해]], [[페르시아 만]] 등이었다. 에게 해와 동지중해를 다니는 선박들의 주요 거래 품목은 밀이었으며, 흑해에서는 밀과 목재를 주로 거래했다. 아시아와 가까웠던 홍해와 걸프 만에서는 향신료들이 주요 물품이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튀르키예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에서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던 길이 43m의 거대한 난파선을 해저에서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 적재량만 1,000톤이 넘었으며 이탈리아의 자기, 인도의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초, 심지어는 [[명나라]]의 유약 자기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활발한 무역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은 어디까지나 농업국가였고 19세기까지 인구와 세입의 80%가 농업과 관계되어 있었다. 무역량이 대폭 증가한 19세기 수출입은 오스만 GDP의 2-3% 정도를 차지하며 1차대전 직전에는 11%까지 증가한다. 자체적인 산업은 19세기까지 전통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론자(Lonca)라는 길드시스템이 주류였는데, 도제(çırak), 보조자(kalfa), 장인(usta) 순서대로 진급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개점면허를 받기까지 오랜기간이 걸렸다. 또한 업종들을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도 용이치 않았다.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시기 서민부터 황족까지 널리 사용하던 [[구리]]제품들을 가공하는 공장들은 그릇을 만들기 위한 동판의 주조는 주조길드에서 담당하고, 이 동판들을 가져와서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대충 모양을 잡아 반제품을 만드는 길드와 그 위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조각, 부조를 새기는 길드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동제품은 내부에 [[주석]]칠을 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도 주석칠을 하는 길드가 따로 있어서 처리했다. 이렇게 배타적인 구조가 산업 전반적으로 만연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후 기계화를 통해 이런 진입장벽과 규제들이 사라져갔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 길드들의 반발로 꽤 오랫동안 난항을 겪었고, 현대 튀르키예에서도 장인증서(Ustalık belgesi)를 발부하는 식으로 아직까지 수공업계에서 남아있는 관행이기도하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크게 변화를 겪는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 [[증기 기관]]과 증기선이 등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역의 대량화와 신속화가 가능해지면서 물류계의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스탄불과 [[베네치아]]를 왕래하는 정기선들이 생겨났으며 그 어떠한 화물이라도, 제국의 어느 항구일지라도 몇 십일 내에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물류의 이동이 대거 증가했다. 전통적인 목조선들이 한 번 운행할 때마다 겨우 50톤 정도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증기선은 거의 1,000톤에 달하는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으니 최소로 잡아도 몇 십배 이상 물류 이동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등 새로운 항로들이 연이어 생겨났으며, 선박들이 통행하기 어렵던 내륙의 강과 그 지류들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강 인근의 무역 도시들이 번성했다. 특히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경우, 1874년에 450만 톤의 화물들이 드나들었으며 1900년에는 무려 1,000만 톤에 달하는 화물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제국 내에서도 기술이 더 발전한 유럽과 가까웠던 발칸 반도에 집중적으로 철로와 역들이 깔리는 등 철도를 이용한 운송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근본적으로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였다. 전체 조세의 40% 정도가 농민들에게서 나왔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자작농이나 소작농으로서 집 인근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 농작물들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따로 동물들을 사육하여 그 젖이나 가죽들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당시 열악한 도로 사정 탓에 발칸의 농민들이 몇 달씩 이동하여 아나톨리아나 시리아에 생산품을 팔러 떠나기까지 했다. 또한 유목민들도 가죽을 팔거나 직물을 짜서 이를 거래하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정착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유목민들은 농민들에 비하여 정부의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18세기 들어서 대대적으로 유목민들을 강제로 도시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발달된 재배 기술이 유입되면서 농경지와 효율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다만 [[미국]]에서 엄청난 양과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이 대량 수입되면서 곡물 가격이 폭락, 제국이 붕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오스만인들은 국내외 무역에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 [[테살로니키|셀랴니크]], [[알레포|할레브]] 등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수많은 화물들이 오고가기도 했다. 1890년대에는 세 개의 지방 도시들을 따로 뽑아 조사해 본 결과, 이들을 경유하는 화물의 양이 당시 오스만의 국제 무역량의 5%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지방 도시만 해도 이랬을진데, [[이스탄불]],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대도시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화물들이 오고갔을 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된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마당이었고, 갈수록 제국의 영토는 좁아지고 부정부패가 행정을 좀먹는 탓에 제국의 내수는 점점 쪼그라들어만 갔다. 한편 국제 무역의 경우,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 역시 국제 무역장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18세기에 비하여 무역량이 10배에서 16배 정도 증가하기는 했다.[* 다만 동시기 유럽의 무역량이 몇 십배 이상 증가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였다.] 국제항으로서 가장 번성한 곳은 당연히 수도 이스탄불과 유럽과 가까운 발칸의 항구들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으로 수출되는 양모의 양은 몇 배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무역 균형의 경우 20세기까지도 수출입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오스만 경제의 파탄을 무역수지 불균형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제무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중계무역이 점차 인기를 잃고 몽골제국 이후 통합정치제의 공백과 그나마 등장한 통합정치제의 단명으로 중동과 중앙아시아 전역의 구매력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기억할만하다.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대인도 무역은 육로인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를 경유하거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고 점차 유럽과 신대륙간의 무역경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굳이 육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고, 영국을 필두로 해양과학기술(위도 및 경도 측정법의 발달, 시계측정법의 발달, 돛의 배치 변경, 항로 제정, 조선술의 발달 등)과 행정기술(해사보험과 보험회사의 탄생, 해사정보지의 발간, 주식시장의 개설, 해양 관련 법령의 제정 등)이 발달하면서 해양무역의 안정성과 직접 무역을 통한 수익 증가로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경유할만한 이유가 많이 사라진 데 있다. 러시아 제국 또한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경로를 새로이 뚫고 시베리아 각지에 안정적인 자원수급기지를 개설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통한 중계무역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낮아졌고,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토후국을 합병하면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주된 시장 중 하나를 뺏어가는 효과도 생겨났다. 오스만 제국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감지했으나 현대에도 이러한 무역양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근세시대에 대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ottomanbank.jpg|width=100%]]}}}|| || 1856년 창립되어 오스만 제국의 중앙은행이었던 오스만 은행 || 오스만 재정의 경우, 거의 대부분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들였으며, 타 중동 제국들과 반대로 도시, 궁전, 군대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상업 활동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6세기의 화폐개혁 이후,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오스만 경제는 거의 500%에 달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당시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는데, 이미 산업 기반이 탄탄했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등은 오히려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졌을지 몰라도 경제구조가 취약했던 스페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상당한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니 차라리 스페인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에서 오는 상인들이 악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고 오스만 제국이 여기에 대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근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오히려 문맹률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베두인들을 계속 농촌에 정착시키는데도 불구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마저 감소하는 등등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18세기 인플레이션은 더 심화되었고 마흐무트 2세 시기 화폐가치가 90% 이상 절하되고 물가가 12배 이상 치솟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은 1850년대까지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해외에 한 번도 빚을 지지 않은 국가였다. 기독교 국가들에게 채무를 진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대출을 최대한 회피한 것인데, 이같은 노력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1854년에 유럽으로부터 첫 채무를 지게 된다. 유럽 열강들은 이 빚을 이용하여 오스만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제국이 더 많은 채무를 지도록 반강제적으로 유도함에 따라 한 번 생겨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75년 경의 오스만 제국은 무려 2억 4,200만 터키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채무를 유럽에 빚지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1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오스만 정부는 '국가채무위원회'를 만들어 빚을 변제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1914년의 국가채무규모는 1억 3,900만 터키 달러 정도까지 하락했다. 다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국가 경제는 유럽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국가채무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직후부터 오히려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경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은 빚을 빌미로 제국 내에 철도, 항만, 역 등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막대한 양의 자본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초기자본이 부족했던 오스만의 튀르크계 은행과 자본가들을 억눌렀다. 게다가 가뭄과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세수가 하락하며 오스만의 재정이 무너졌고, 전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주의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제국 재정의 해외 의존도는 날로 심해졌다.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이미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튀르키예의 재정은 파탄 직전의 단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